[7화] 서로를 입양한 우리 - 고양이가 내게 왔다

비범한 가족이야기 2012.05.18 16:45

 

 

l 비범한 가족이야기2012년 3월~10월까지 8개월 동안 발행되는 월간 칼럼으로, 우리 사회에서 조금은 다른 가족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의 기고 또는 인터뷰를 통해 꾸며집니다. 월마다 특별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4~5편의 가족이야기가 펼쳐집니다. 

l 5월의 키워드 ‘돌봄’
함께 사는 순간, 서로를 마음에 담는 순간 돌봄의 마음과 역할이 생겨난다. '미워도' 해야만할 돌봄도 있고, 사랑만으로 실행되지 않는 돌봄도 있다. 돌봄의 관계는 원망, 짜증, 피로가 따라오기도 하지만, 어울려살 수 있도록 해주는 염치,이해, 의지, 행복을 배울 수 있게 해준다. '돌봄'은 엄마 혹은 여성들만 해야하는 역할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5월의 첫 번째 이야기  [7화] 서로를 입양한 우리, 고양이가 내게 왔다

 

루인(트랜스젠더/퀴어 연구활동가, runtoruin@gmail.com)

 

 

함께 살고 적응하고, 다시 살아가고: 리카에게

  

서둘러 모래와 화장실, 사료를 주문했다. 기대는 했지만 내가 고양이와 함께 살 줄은 몰랐다. 길고양이를 임보하고 있다는 연락을 전해들었고, 고민했다. 두려웠고 두근거렸다. 망설이다가 너무 늦지 않게 연락을 했다. 서둘러 필요한 물품을 구매했다. 그렇게 묘연(猫緣)을 준비했다.

 

물품을 준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가 문제였다. 고양이와 함께 살고 싶었다. 꽤 오랜 바람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양이와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엔 준비가 없었다. 고양이가 주인공인 만화책, 고양이와 함께 사는 법을 설명한 책 한 권 읽은 적 없을 정도로 내겐 막연함 뿐이었다. 그저 물품을 사고, 누군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하는 정도의 각오만 있다면 충분한 줄 알았다. 그렇게 덜컥, 말 그대로 덜컥, 고양이가 내게 왔다.

 

내게 온 첫날 리카는 곧장 집을 탐사 했다. 낯선 곳이라 구석에 숨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집 전체를 돌아다니더니 나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잠시 앉아 있다가 내 팔을 앙, 물곤 내려갔다. 리카는 우아했고 또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밤엔 달랐다. 밤마다 우다다 달렸고 난 잠을 잘 수 없었다. 한창 바쁘던 그때 나는 밤을 거의 뜬 눈으로 보내곤 했다. 잠이 들만 하면 리카는 달리거나 울었다. 밤에 자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깨지 않으려고 했지만 혹시나 아파서 우는 것일까봐,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그리고 아침이면 푸석한 얼굴로 집을 나섰다. 헤벌쭉 웃는 얼굴이기도 했다. 좋았다. 내 표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헤벌쭉 웃으며 다녔지만 함께 사는 것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혼자 산 나는 옷을 어떻게 갈아 입어야 할지, 샤워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한동안 리카가 날 볼 수 없는 곳에서 옷을 갈아 입었고 샤워 후 옷을 다 챙겨 입고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내게 고양이는 함께 사는 어떤 존재였다. 그랬기에 리카와의 동거가 사람과 동거하는 것처럼 낯설었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리카는 임신한 고양이였다. 고양이와 생전 처음 사는데 벌써 출산 경험이라니... 길고양이라 몸이 부은 것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럴리 없었다. 배가 너무 빵빵해서 내게 오고 1~2주면 출산할 것만 같았다. 몇 주를 오늘내일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서야 출산했다. 리카는 내 무릎 위에서 출산하려고 했다. 출산을 앞두고 내가 마련해준 자리가 아니라 내 무릎 위에서 힘을 주었다. 난 서둘러 리카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출산이 끝난 후 다시 나의 무릎 위로 올라와 골골거리며 한동안 온기를 나눴다. 그렇게 여덟 아기 고양이가 태어났다.

 

 

출산 후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리카와 나의 관계는 나빠지고 있었다. 나의 잘못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해 일 년 중 그 시기가 가장 바빴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밤 늦게 돌아왔다. 여덟 꼬물이를 돌보는 리카의 어려움, 스트레스를 공유할 시간이 부족했다. 시간은 핑계다. 리카가 아이를 돌본다면 나는 리카와 정서적 교류를 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늦게 귀가했기에 한 시간이라도 리카와 함께 하려고 했지만, 고백하건데 그땐 여덟 아깽이가 더 귀여웠다. 리카가 아기들에게 젖을 주는 동안 밥과 물을 마실 수 있게 작은 접시에 밥과 물을 담아 직접 먹이기도 했지만 이 정도론 부족했다. 리카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변했고.. 아니 내가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어떤 존재와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 한 나는 이 긴장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 출산한 존재와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고 또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 해야 하는지 몰랐다. 내가 마음을 혹은 몸을 열어야 함을 몰랐다. 그 누군가의 습관에 일방이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조금씩 조절해야 했는데 그걸 몰랐다. 난 신경질을 감추지 못 한 상태로 리카에게 최선을 다하는 척했다. 그것을 눈치 못 챌 리카가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우리의 관계는 안정기에 들어섰다. 분양이 끝난 다음의 일이었다. 아기고양이에게 정을 붙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이름을 붙이지 않았지만 아이를 분양하며 가끔은 울었다. 한 번은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그렇게 이별하며 리카와 나, 그리고 리카의 딸 바람만 남았다. 그제서야 내게 여유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혹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리카의 눈을 보며우리 많이도 말고 일단 20년만 같이 살자고 말하곤 했다. 집고양이 평균 수명이 15년이라고 하니 20년이면 과한 욕심도 아니잖은가. 다른 많은 집사들이 그렇게 믿듯, 별 다른 일 없이 오래오래 함께 살기를 바랐다. 우리 셋, 오래오래 함께 살기로 약속한 우리 셋.

 

리카는 애교가 많고 또 내 손을 많이 요구했다. 내가 집에 있을 때면 수시로 놀자고 울었고, 내 무릎 위에 올라와 있길 바랐다. 내가 집을 나서면 문 앞까지 나와 가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집에 들어갈 때면 자다 깬 얼굴로 달려나와 나를 맞이했다. 외출할 때면 나가지 말라는 표정이었지만 쓰레기를 버리러 1분 가량 나갈 때면 야옹야옹, 울곤 했다. 어디가냐며 울었다. 너무 서럽게 울어 미안할 정도였고, 또 기쁘기도 했다. 잘해주는 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 날 찾는 것일까? 리카가 바라는 만큼 함께 놀지도 않고 리카가 바라는 음식을 양껏 주는 것도 아닌데... 리카는 언제부터 나를 자신의 동거인으로, 동반종으로 받아들인 것일까? 내게 리카는 그냥 어느 순간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리카를 내 일부로 받아들여야겠다고 다짐해서가 아니었다. 함께 살면서 그냥 어느 순간 그렇게 되었다. 공간을 공유하고 생활을 함께 하며, 그 역사가 켜켜이 쌓이면서 우리는 서로의 일부가 되었다.

 

역사를 공유했지만 난 리카가 하는 말, 고양이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싶진 않았다. 처음엔 궁금했다.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 수가 없어 사람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내가 리카에게 충분히 잘 해 주는 것이 아니기에 무섭기도 했다. 내가 충분히 잘 해줄 수 없기에 리카가 어떤 얘기를 할지, 어떤 불만을 토로할지 걱정이기도 했다. 그냥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이 편했다. 적어도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두렵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 간의 대화가 아닌 다른 방식의 언어가 더 좋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면 상대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의 대화가 좋았다.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리카와 살면서 깨달았다.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소통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관계. 이것은 역사를 쌓아가며 각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깨달았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 과정에서, 인간 관계에서 갈등이 생기는 것은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나의 말을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빚은 비극은 아닐까를 고민했다. 소통할 수 있다는 기대가 관계를 파국으로 이끄는 것은 아닐는지. 대화할 수 없는 상황은 관계를 더 편하게 만들고 (역설적으로)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함께 살며 포기할 부분은 포기하고, ‘나중에 더 잘 해 줄게라고 적당히 미래를 약속하며(혹은 현재를 유예하며) 우리 셋은 잘 어울렸다. 시간은 흘렀고 일 년을 넘겼다. 고양이와 일 년 넘게 살았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약속한 20년 중 고작 일 년을 함께 했지만, 그 일 년은 내가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하는 계기였다.

 

고양이와 가족을 꾸린다는 것, 그것은 결국 일방적으로 내가 도움을 받는다는 의미였다. 주변 사람들 모두 내가 고양이와 살면서 많이 변했다고 얘기했다. 긍정적 의미에서의 변화였다. 수다가 늘었고 삶에 여유가 생겼다. 고양이와 살며 지출하는 적잖은 비용으로 경제적 여유는 줄었지만, 삶엔 여유가 생겼다. 이 여유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스몄다. 진부한 얘기지만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것은, 내가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아니라 고양이가 나를 돌보고 내가 나를 돌보는 일이다.

 

2011 5월 어느 날 일주일 정도 리카가 밥을 안 먹었다. 뒤늦게 병원에 데려갔고 입원을 했다. 의사는 간이 없다고 했다. 급성이 아니라 일 년 이상 진행된 것 같다고 했다. 사흘 가량을 입원했다. 매일 병문안을 가며 리카가 깨어나길 바랐다. 리카의 얼굴을 보며우리 함께 살기로 했는데, 얼른 일어나야지라고 말하며 좋은 생각만 하려 했다. 행여나 안 좋은 나의 마음이 전해질까봐 마냥 괜찮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면서도 리카를 붙잡고 있는 것이 나의 부당한 욕심은 아닐까 갈등했다. 리카는 이렇게 누워 있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운데 나의 욕심이 리카를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그래서 미안했다. 잘 해준 것도 없는데 아픔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만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가 있는 날, 그 햇살 뜨겁던 날 오전 11 20분 경, 리카는 무지개 다리를 건너 고양이별로 서둘러 떠났다. 리카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 해 미안했고, 또 미안했다.

 

리카를 떠나보내는 시간을 겪으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두 개 뿐이었다. 미안하고 고마워. 화장장에 걸려 있는 많은 메모장에도 같은 말 뿐이었다. 미안하고 또 고맙다고. 더 사랑하지 못 해서, ‘다음에라고 미뤄서 미안했다. 한창 바쁠 때 놀자고 하면 조금은 짜증난 목소리로나중에라고 말했던 것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때 다만 1분이라도 시간을 냈다면 좋았을 텐데. 1분이 그렇게 대단한 시간도 아닌데.

 

그리고 1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있다. 우리의 관계는 법적 해석에선 가족도 아니고 입양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니다. 하지만 관계와 정서적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가족이며 서로를 입양한 사이기도 하다. 리카의 빈 자리를 바람과 내가 함께 채우고 또 애도한다. 비록 이 애도는 소수의 사람과만 공유할 수 있는 것이지만, 공유할 수 있는 사건이란 점에서 공동체의 일이기도 하다. 나는 반복해서 글을 쓰고 얘기를 하며 공개적 사건으로, 애도할 수 있는 사건으로 만들고 있단 점에서 리카는 내가 맺은 공동체 혹은 가족의 구성원일 수밖에 없다. 리카가 내 가족임을 확증하는 행동은 우리가 함께 살았던 시간을 공론화하는 일이기도 하다. 가족만이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어서가 아니라 이런 작업을 하는 관계가 가족/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리카, 안녕. 그리고 안녕.

 

(리카를 입양하기 직전부터 생활이 안정기에 접어든 7개월 가량의 이야기는 ricathecat.tistory.com 에 있고, 그 이후의 일상과 리카를 떠나보냈을 때의 이야기는 www.runtoruin.com 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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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게이 커플 "나랑 같이 살아줄래?"

비범한 가족이야기 2012.04.13 12:23

 

l 비범한 가족이야기2012년 3월~10월까지 8개월 동안 발행되는 월간 칼럼으로, 우리 사회에서 조금은 다른 가족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의 기고 또는 인터뷰를 통해 꾸며집니다. 월마다 특별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4~5편의 가족이야기가 펼쳐집니다. 

l 4월의 키워드 ‘공동생활’ 비범한 가족들의 '함께 살기'는 원가족들을 위한 하얀거짓말, 함께 살면서 쌓이게 되는 신뢰, 그리고 가끔은 '같이 사는 게 쉬운 것은 아니구나'라는 푸닥거리가 있지요. 비범한 가족들의 공동생활은 우리 사회 모든 동거가족들이 한번쯤은 고민해봐야할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4월의 첫 번째 이야기  [5화] 게이커플 "나랑 같이 살아줄래?"

성소수자에게 '자기만의 방'이란, '우리들의 방'이란 

가족구성권연구모임  가람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것은 여성뿐만이 아닐 것이다. 동성애자, 이주민, 장애인 등 한 사회의 소수자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오롯이 마주할 수 있는 공간, 그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이건 사실 모든 사람에게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지만, 소수자로 표상되는 자들의 방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일 테다. 우연찮게 아들이 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20대 중반인 그의 방을 매일같이 뒤진다는 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기만의 방은 꼭 물리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 역시 알게 된다.


 

나에게도 그랬다. 나만의 공간, 나만의 살림들. 그 속에서 혼자서 방탕해 보고도 싶었고, 뒹굴다 지쳐 잠들어 보고도 싶었다. 밤새도록 음악도 틀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드라마를 보며 펑펑 울기도 하고 야동도 보고 남자도 들이면서 노닐고 싶었다. 누나가 결혼하면서 누나와 함께 오래 살던 별 잘 들던 집을 떠나 '저 어디 컴컴한 곳'에 있는 하늘이 내다보이지 않는 원룸으로 방을 옮기기로 한 때, 나는 나의 방탕하고 음란할 빈 방을 보며 커다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오, 나만의 방이라니.


 

같이 살 줄은 몰랐다

 

방을 계약하고 나서 얼마 후, 나는 그를 만났다. 그분은 내가 단원으로 있는 게이코러스 지_보이스의 신입단원이었다. 화사하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신입단원에게 접근하면 혹시라도 조직에 해를 끼칠까봐 나는 정기공연 일정을 마치게 되면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를 세 번째로 본 2010년의 제헌절, 법학을 공부하던 나는 제헌절의 의미를 새기며 경건하게 술을 퍼먹고 있었고, 그날따라 늦게 이어진 지_보이스의 뒤풀이 끝에 그는 집으로 가는 막차를 놓쳤고, (중간 생략) 다음날 아침 우리는 그의 고향인 강릉 가는 고속버스에 올라타 학교도 회사도 잊고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연애는 이렇게 평범하게 시작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보름 후 이사하는 날, 그는 내 이사를 도와주고 나서 그날부터 집에 들어가지 않고 내 방에 머물게 된다. 한 한 달쯤 지났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자갸, 근데 왜 집에 안 들어가? 자갸 짐도 다 집에 있잖아."

 

그의 대답.


"나 짐 없어."


문득 미안해진 나는 그를 이끌고 슬리퍼를 끌며 방 근처의 가장 좋은 식당에 데려가 초밥을 시켜놓은 후, "나랑 같이 살아줄래?" 라며 프로포즈를 하게 된다. 그렇게 '조손가정'의 '손'을 담당하고 있던 그는 '남남(男男)동거가정'의 '남'을 담당하게 된다. 동거는 이렇게 평범하게 시작된다.


자기만의 방을 노래 부르던 내가, 이렇게 남자와 같이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사귄 지 보름밖에 안 된 남자와.

 

우리들의 방

 

같이 사는 데 딱히 불편함은 없었다. 이상하게 잘 맞았다. 잠버릇도 비슷했고, 식성도 비슷했다(남자 식성은 좀 다르다. 그는 송중기파, 나는 윤계상파). 그리고 내숭을 떨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자기만의 방에 들어앉은 사람처럼 남들 안 보는 데서만 하던 짓도 그냥 했다. 티브이를 보다 울어도 괜찮았고, 틈만 나면 하는 버릇대로 귀이개로 귀를 후벼도 괜찮았다. 그런 내가 신기하기도 했더랬다.


 

집안일도 딱히 나누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레 적당히 나뉘었다. 청소나 빨래는 시간 되는 사람이, 요리는 내가, 설거지는 그가, 화장실 청소는 내가, 살림살이를 장만하거나 장을 보는 것은 같이. 뭐 이런 갈등 없는 부부가 다 있나 싶게, 그냥 그렇게 잘 맞았다.


우리는 살림을 합친 것으로 생각했다. 동거와 살림을 합치는 것은 좀 다르다. 누군가의 공간에 한 사람이 초대되어 들어가는 것이라기보다는 함께 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집은 누가 하고, 가구는 누가 하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같이 사고, 같이 아끼며, 같이 쓰면서 살아가는 것. 그런 느낌이 좋았다. 서로의 통장을 함께 보관하고, 살림 계획이며 저축 계획을 같이 짜고, 같이 돈을 모아 여행 가고, 팔짱 끼고 산책도 나가고, 가장이나 마찬가지인 그가 본가에 돈을 부칠 때에도 함께 상의하고, 명절에 고향집에 보낼 선물들을 함께 고르며 그렇게 사는 느낌. 얼마 전 그 방을 떠나 내가 다니는 직장 근처에 새로 방을 함께 구하면서는 이제는 명실 공히 함께 만드는 집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 좋았던 것 같다. 우리들만의 방. 눈 뜨면 기분 좋은 이 안락한 공간.


반응들

 

살림을 합쳤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주위 사람들의 반응들은 다양했다. 한 레즈비언 언니는 "야, 보름만에 살림 합치는 게 무슨 게이니, 레즈 해!"라고 하기도 하고(레즈비언 커플들은 게이 커플보다 같이 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경험 많은 게이 언니는 "가람아, 그냥 같이 좀 살다가 생각해 봐. 살림 합치는 것은 다른 문제야"라면서 걱정해 주기도 하고, 이성애자 남성인 선배는 "니네 너무 쉽게 동거하는 거 아니니?" 하면서 동성애자의 빠른 진도를 우려하기도 했다. 음.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지지해 주었던 분들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럭저럭 그렇게 같이 산 지 만 2년을 향해 가는 지금, 그냥 쟤네들은 좀 잘 맞는 부부인 것처럼 보이는 듯하다.

 

한편, 그와 같이 사는 모습을 보신 우리 어머니의 반응. 우리 사이를 진작부터 알고 있던 누나의 전언에 따르면, 아들이 게이인 것을 모르시는 어머니께서는 "1. 가람 쟤는 승질상 누구와 같이 살려고 하는 애가 아니다. 2. 게다가 같은 이불을 덮기까지 한다. 3. 고로 가람은 게이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하시다 "아우, 내가 별 생각을 다 한다"라고 하셨다고 한다. 음….

 

자기 자신의 방


이 글을 쓰면서 게이'도' 같이 잘 산다거나 게이라서 '더' 같이 잘 산다거나 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까 했지만, 암만 생각해도 특별히 그런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런 거 상관없이, 그냥, 잘 산다. 이제까지 함께 잘 살아 왔듯,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


아무래도 혼인과 같은 제도적인 가족 구성을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수이 살림을 합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주위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살 수 있다거나 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준다거나 우리를 가만히 놔둔다거나 하지도 않은 듯하다. 이런 것들을 넘어서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맞는 대로, 흐르는 대로 편하게 가족을 꾸리거나 꾸리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지닌 조건이나 환경, 그리고 사회의 견고한 가족의 구조는 그렇게 되도록 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땅을 곰곰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한편으론 자기만의 방을 갖고 싶었던 내가, 그와 함께 나에게 맞는 '자기 자신의 방'을 찾았다는 생각도 든다. 나도, 그도 말이다. 앞으로도 사람들과 함께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맞는 대로, 흐르는 대로 편하게 자기 자신의 방을 찾아갈 수 있는 세상을 향해 힘을 보탤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 이것이 바로 '비범한 가족 이야기'가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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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혈연가족, 시작과 새로운 시작

비범한 가족이야기 2012.04.05 12:50

l 비범한 가족이야기2012년 3월~10월까지 8개월 동안 발행되는 월간 칼럼으로, 우리 사회에서 조금은 다른 가족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의 기고 또는 인터뷰를 통해 꾸며집니다. 월마다 특별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4~5편의 가족이야기가 펼쳐집니다. 

l 3월의 키워드 ‘시작’ 비범한 가족은 만남으로 시작될까요, 헤어짐으로 시작될까요? 행복, 혹은 불안으로 시작될까요. 3월의 <비범한 가족 이야기>는 결혼- 자녀의 출산이라는 전형적인 시나리오를 벗어나는, 우리 사회의 비범한 가족들의 시작’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3월의 네 번째 이야기  [4화] 혈연가족, 시작과 새로운 시작

친족 모임이라는 불안공동체, 그 안의 변화

* 이 글은 인권오름 292호로 발행되었습니다.

가족구성권연구모임   김원정

 

 

 

‘집안사람들’

 

나는 유난히 뼈대 있는 가문을 강조하는 집안에서 딸 셋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덟 형제자매 중 막내였기 때문에 ‘대를 이을’ 아들이 절실하지는 않았지만, 아들이 하나도 없는 집은 우리 집뿐인지라 엄마가 자주 할머니 눈치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비록 딸내미지만 아버지는 늘 ‘의성김씨 문충공파 16대 후손’임을 잊지 않게 하셨고 우리 가문의 ‘양반됨’을 강조하셨다. 4대를 모시는 제사와 명절 차례를 지내느라 1년에 최소 10번은 큰집에 가곤 했는데, 그 때마다 조카들을 불러 모아 조상의 업적을 설명하시던 큰아버지 말씀은 보충수업이었다. 그렇게 가문의 일원으로 성장하던 나는 초등학교에서 김씨인 급우들의 본을 묻고, 의성김씨를 찾으면 아버지에게 ‘집안사람’인 친구가 있노라 신고까지 했다.

 

얼마 전 영화 <범죄와의 전쟁>을 보고 나는 잊었던 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정·재계 인사들은 물론 범죄조직 보스까지 경주최씨 충렬공파라는 ‘집안사람’으로 묶어 서로 봐주고 밀어주는 네트워크를 형성했던 최익현(최민식). 요즘 젊은이들이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을 장면들에 일가 사람을 늘 강조하며 살아온 내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져 놀라고 또 놀랐다. 1960년대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대학을 나온 아버지. 이렇다 할 재산도 없는 아버지에게 ‘집안사람’은 아버지가 닿을 수 없는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루트였다. 자원이라고 해봐야 그리 큰 것도 아니다. 가족이 아플 때 조속히 입원을 알선해 주는 정도의 도움? 그러나 사회안전망이 전무했던 70-80년대 ‘빽’도 없는 평범한 회사원 아버지에게 가문 네트워크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일종의 보험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보다 가까운 친족을 서로 거두며 사는 건 일상이었다. 나름 자가 아파트였던 어릴 적 우리 집엔 여러 사촌 언니 오빠, 이모 삼촌들이 거쳐 갔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지방서 살다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사촌들은 아마도 월세 방이라도 구할 때까지 우리 집에 머물렀던 것 같다. 우리 자매들은 밤새 놀아주는 사촌들과의 동거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지만, 엄마 입장에선 결코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친족공동체 구성원들을 거두는 건 상호적이었다. 엄마는 막내 동생을 낳아 힘들 때 언니를 고모 집에 몇 달 간 맡겨두기도 했고, 방학 때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는 세 딸을 몽땅 작은 집에 보내 그나마 숨통을 틀 수 있었다.


30년 만의 친족 모임 부활


내가 양반 가문의 일원을 자처했던 어릴 적 에피소드는 어디 가서 말하기도 부끄럽다. 이 집안에서 각종 의례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다른 집 새끼들까지 돌보며 살아야했던 엄마들의 삶을 돌이켜보면 아찔하다. 그러나 70년대 고향을 떠나와 핵가족을 꾸린 엄마와 아버지에게 친족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였다. 지금 나와 그 친족들 사이의 거리는 한참 멀지만, 사별한 아버지가 때론 딸들보다 당신 형제자매와 조카들에게 더 정서적으로 의지하는 걸 보면 아버지에게 이 공동체의 의미는 변함없는 것 같다.

 

8년 전 결혼을 하면서 나는 더더욱 친척들과 멀어졌다. 그러다 몇 년에 한번 어른들을 뵐 땐 출가한 딸이라는 나의 위치가 새삼 확인되곤 한다. 정씨 집안에 시집갔다 하여 큰아버지는 나를 “정실이”라 부른다. 나는 할머니가 시집간 고모들을 이렇게 부르는 걸 듣고 자란 터라 알지만, 생전 처음 들어본 사람도 많을 것 같아 네이버 오픈사전을 인용하여 ‘실이’의 뜻을 풀어보면 “여성이 시집을 가면 시가의 성을 따라 부르는 호칭”으로 “주로 친정에서 사용되는 호칭인데 ‘김실이’ ‘이실이’ ‘강실이’ 이렇게 부른다.”

 

그런 내가 얼마 전 친족 모임에 호출되었다. 아버지 8남매와 그 자식들이 모두 모이니 필히 참석하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이럴 때 얼굴 비치는 것 말고 딱히 효도 실천이 없기에 군말 없이 나가기로 했다. 사실 나의 임무는 아버지가 내 조카들을 친척들에게 선보이는 일을 돕는 것, 두 새끼를 이고 지고 온 동생을 보조하는 역할이 요구된 것이다. 30명이 넘는 친척들이 모였고, 그날 모임은 정식으로 발족(?)하여 연중행사로 자리 잡았다. 오는 5월 대규모 친족 모임이 기획되었는데, 이건 내가 초등학교 때 이후 처음이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왜 이 친족들은 ‘가족’으로 다시 서로를 묶으려는 걸까.


아마도 큰아버지의 병환이 자극이 되었던 것 같다. 머지않아 형제자매들이 한분 두 분 돌아가시게 되면 이 혈연공동체가 사라질까봐 두려운 게 그 세대 심정이다. 그런데 이 모임이 계속 유지된다면 아버지 세대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될 거란 느낌을 받았다. 그날 남자 사촌들끼리는 평소 연락을 하며 만나고 지내왔다는 걸 알고 놀랬는데, 이 모임은 자연스럽게 중년 남자 사촌 중심의 네트워크가 될 것 같다. 특히 모임의 결성과 기획을 주도하고 비용을 부담한 사촌들은 누가 봐도 사회적 지위가 탄탄한 오빠들이었다. 그렇지 않은 남자 사촌들은 거의 참석도 하지 않았다. 우리 세대에 친족공동체는 이렇게 다른 의미로 전환되어야 유지될 수 있는 네트워크가 되었다. 서로 얼굴과 이름도 잘 기억 못하는데 핏줄이 무슨 소용인가. 그 빈자리를 채워 줄 명분은 아마도 힘과 자원을 가진 사람에 의해 세워질 것이다. 어찌 보면 혈연가족을 유지해 온 실제의 메커니즘도 사실 이것이다.


친족에서 핵가족으로, 다시 새로운 가족으로


며칠 후 연락 담당을 맡은 사촌 오빠에게서 메일이 왔다. 8남매와 자녀, 그 배우자, 손주와 증손까지 무려 130명의 이름과 주소, 연락처가 적힌 주소록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름조차 낯선 사촌과 조카들이 수두룩했지만, 이 엑셀 파일에 담긴 흥미로운 정보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주소만으로도 노년의 고모들을 누가(아들 혹은 딸) 부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고, 집안의 형제자매들이 이룬 각각의 가족들이 한 동네에 모여 사는 경향도 발견되었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자매들이 어머니와 함께 한 아파트에 살고 있기도 했다. 오늘날 핵가족들이 어떻게 돌봄의 부담을 나누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지도였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34명의 사촌들이 엑셀의 <배우자>와 <자녀 1>, <자녀 2> 항목을 대부분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는 점이다. 빈 칸은 주로 우리 집에 몰려 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나의 언니뿐이고,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는 사람은 나와 최근 결혼한 사촌 둘 뿐이다. 이혼한 사촌은 단 한명도 없다. 요즘 시대에 이렇게 한결같이 ‘정상가족’을 꾸려 사는 집안이라니! 이 가운데 비혼을 선언한 우리 언니는 가히 ‘미친 존재감’이다. 물론 여기 적힌 친척들은 언젠가 언니는 결혼을 하고 나는 아이를 낳으리라 기대하겠지만 말이다.

 

이 친족공동체에서 탄생한 ‘정상가족’들의 분포가 유독 강한 혈통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이성애 핵가족의 규모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내 친족공동체의 강력한 가족 규범 속에서도 ‘다른’ 가족은 싹텄다. 적어도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의 조카들에겐 더 많은 선택의 가능성이 열려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서 혈연과 친족관계에 기반을 둔 가족은 멀어지겠지만, 서로 돌보며 살아가는 생활공동체가 엑셀에 질서정연하게 담을 수 없을 만큼 다채롭게 구성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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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이주 여성의 정착

비범한 가족이야기 2012.04.02 13:38

 

l 비범한 가족이야기2012년 3월~10월까지 8개월 동안 발행되는 월간 칼럼으로, 우리 사회에서 조금은 다른 가족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의 기고 또는 인터뷰를 통해 꾸며집니다. 월마다 특별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4~5편의 가족이야기가 펼쳐집니다. 

l 3월의 키워드 ‘시작’ 비범한 가족은 만남으로 시작될까요, 헤어짐으로 시작될까요? 행복, 혹은 불안으로 시작될까요. 3월의 <비범한 가족 이야기>는 결혼- 자녀의 출산이라는 전형적인 시나리오를 벗어나는, 우리 사회의 비범한 가족들의 시작’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3월의 세 번째 이야기  [3화] 이주 여성, 시작과 정착  

"아직 정착하지 못했어요" 새로운 가족만들기와 여성으로 정착하기

베트남 이주여성 원옥금씨 인터뷰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 인턴      명화

 


 

“아직 정착하지 못했어요.” 원옥금씨와의 인터뷰 중에 가장 많이 나온 말이다. 1996년, 통역사로 일하던 원옥금씨는 베트남으로 파견 나온 한국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해 결혼하고 이듬해 남양주로 이주해 쭉 지금의 집에 살았으니, 한국 생활만 햇수로 15년이다.

 

이주여성의 ‘시작’을 듣고 싶어 찾아왔다는 설명에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그땐 지금이랑 많이 달라서…”라고 운을 뗐다. 첫 만남 이야기, 어릴 적 동네 이야기를 거쳐 남양주 아파트에 살기 시작한 시기로 넘어가자 그녀는 갑자기 펜을 꺼내 들었다. “여기 써볼게요. 이면지.” 그녀는 뒤에 있을 재판에서 통역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들고 있던 종이에는 이주노동자 파업과 관련한 법령들이 적혀있었다. 이윽고 종이의 빈 곳에 아래로 뻗은 강과 그 위를 흐르는 물결이 그려졌고, 다음엔 옆으로 볼록 튀어나온 웅덩이가 생겨났다. “강물은 계속 흐르는데 여기(웅덩이) 있는 물고기가 된 것 같아요. 정체되고 소외된 느낌.” 나는  들고 있던 질문지 빈 곳을 찾아 잽싸게 그 그림을 따라 그렸다. 지금부터 이어질 인터뷰의 기록이 물고기와 강, 한 가족의 시작과 또 다른 시작, 원옥금씨가 겪어온 기쁨과 고통 모두를 되도록 훼손하지 않기만 바라고 있다.


물고기 : 한국으로 건너와 가족을 만들고


원옥금씨가 남편과 처음 만났던 15년 전, 베트남 사람들에게 한국은 생소한 나라였다. 당시 베트남은 미국의 압력 하에 있었고, 사회주의권 바깥의 나라와는 교류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나라로 가겠다는 딸 앞에 부모들이 고집스럽게 반대를 외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셨느냐는 싱거운 질문에 원옥금씨는 남편이 큰 절을 올리자 부모님이 크게 감동하여 결혼을 허락하셨다는 이야기, 알고 보니 남편의 성씨인 하산 이씨 가문이 베트남 왕족의 후예였다는 이야기, 부모님이 보관하던 족보를 뒤져봤더니 남편의 이름이 버젓이 등재돼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재산이 다르고 집안도 다른 주인공들이 마침내 사랑의 약속을 완수하는 드라마를 볼 때처럼, 우리 둘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천천히 한국의 이야기로 넘어왔다. 베트남에서 결혼식까지 올렸는데 왜 굳이 한국에 살 생각을 했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원래 베트남에 살 생각이 없었어요.”라고 답했다. 아직 어리둥절해 있는 내 표정을 보더니 “원래 베트남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는 걸 좋아해요. 언니도 지금 호주에 있고.”라고 덧붙였다. 당시 베트남은 75년 전쟁이 끝나고 나라 전체가 황폐함에 달리고 있었고, 의료·교통·복지 등 제반환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베트남 여성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배우자와의 관계였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베트남 남성들이 알콜에 중독되거나, 가정폭력을 휘두르거나, 무책임하게 집안을 방관하는 모습을 숱하게 보고 들었던 터였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 역시도 자상한 아버지를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어서, 나도 모르게 어디나 남자는 다 비슷하지 않냐는 냉소가 흘러나왔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한국은 1366(여성긴급상담전화)도 있고, 여성단체 활동이 활발하잖아요. 베트남에서는 정부도 (가정폭력 피해여성을) 보호해주질 않아요. 112에 신고해도 오지 않아요.” 원옥금씨가 가부장적인 지역사회를 탈주하고자 했던 욕망은, 풍문으로 부풀어진 장미빛 상상에 멈추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베트남 여성들을 흡수하는 베트남 남성과의 결혼이라는 미래의 장단을 신중히 가늠해보았고, 두 국가의 경제구조와 제도적 지원을 고려하여 한국으로의 이주를 결정했다.


강물 : 한국에 살면서 다시 가족을 만들고


시부모와의 관계도, 남편과의 결혼생활도 “어려울 게 없었다”던 원옥금씨는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 “취업”을 꼽았다. 당시 살던 동네가 개발제한구역이라 공장도 별로 없었고, 아직 외국인 채용이 흔하지 않았던 시대였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제일 벅찬 장애물은 한국 가족들의 “배려”였다. 시부모님은 원옥금씨가 집안일하며 편히 지내길 바라셨고, 남편은 원옥금씨의 피부색이나 말씨 때문에 차별을 받을까 취업을 반대했다. 어쩌면 그건 맞벌이부부나 이주노동자가 어색했던 당시 한국문화의 반영일수도 있고, 혹은 아내를 안전한 곳에서 호강시켜주고 싶은 따뜻한 마음씨의 표현일수도 있다. 그러나 가족들의 배려는 원옥금씨의 생각과 어긋나버렸는데, 그녀의 지난 삶은 베트남에서 영위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만들어진 가치관과 관계들은 하루아침에 뒤엎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맨 처음 고민은 베트남에 살고 있는 가족들이었다. 해외 통화에 비싼 데이콤료가 부과되던 때, 한 달에 한 번으로 제한된 통화에서조차 가족들은 못내 섭섭함을 내비치곤 했다. “(베트남에서는 딸이) 외국 가면 당연히 돈 부쳐주는 게 의무예요. 안 부쳐주면 동네에서 망신이에요.” 원옥금씨 가족의 살림이 어려운 편은 아니었지만, 국제 결혼한 딸이 보내주는 외화며 가재도구 따위로 집안의 위신을 세우는 분위기가 워낙 주변에 팽배했던 탓이다. 누구네 집은 브로커를 통해 결혼시키더니 몇 천 만원을 송금받더라 하는 종류의 소문이 공공연하게 마을을 들쑤시고 다녔다. 게다가 원옥금씨 자신과의 다툼도 있었다. 한국의 자본주의 가족임금제 하에서 부인의 역할은 주로 남편을 위한 가사노동, 감정노동, 재생산노동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를 기조로 한 베트남에서는 결혼을 하든 안하든 모두는 노동을 하길 바랐고, 하고 있었다. 취직을 못하고 종일 집안에 있으려니 “돈 안 버니까 나는 쓸데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고민들은 2006년 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고, 가족의 우려 속에 첫 학기 5과목을 모두 수료해냈을 때부터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 뒤로 원옥금씨는 점차 외국인 노동과 관련한 법에 흥미를 가졌고, 이주노동자 기관이나 법정에서 통역 요청이 속속 들어왔다. 지금 천주교 의정부교구 이주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녀에게 법을 공부하고, 인권활동을 시작하면서 가족과의 관계는 어떻게 변했는지 물었다. “시어머니도 자랑스럽다고 그러죠. 제가 TV에도 나오고, 전에 온 가족이 함께 상 받으러 갔었어요.” 본인으로서는 자신감이 생겼고, 가족들은 놀라운 마음으로 지지했다. 두 달 뒤, 원옥금씨 가족들은 15년간 살던 남양주를 떠나 서울로 이사할 계획이다. 왜 서울로 이사하냐고 묻자 그녀는 그곳에서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는 좀 정착이 되고 맘도 편해질 것 같다는 말 속에서 처음으로 “정착”은 긍정적인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었다.

김현미는 이주여성 엔터테이너를 연구하면서 그들의 욕구와 고통을 동시적으로 직면하는 어려움을 고백했다. 그녀의 말처럼 이주여성들은 “자신이 처한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고 자신의 경험이 지니는 모순성을 끊임없이 해석하는 주체란 점에서, 억압의 생존자이며 동시에 변혁자”(『글로벌시대의 문화번역』)일 것이다. 원옥금씨는 법을 공부하면서 한국 사회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녀가 계속해서 부정형 혹은 미래형으로만 말하던 “정착”은 아마도 가족이 탄생하는 순간을 계속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그녀의 생활에서 비롯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가부장적인 로컬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 베트남과 한국의 결혼에 대한 서로 다른 기대들 사이에서 협상하는 과정, 오랫동안 형성한 자신의 세계관을 낯선 사람들에게 설득한 시간들. 그렇게 그녀에게 가족의 “시작”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여러번 반복되었으며 그때마다 좀 더 현실성을 갖추어 갔다.

 

 

재판장에 다다른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의 전화를 받은 원옥금씨는 가족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남기고 재판준비를 위해 식당을 나섰다. 법정으로 들어서는 손에는 서류들이 경쾌하게 흔들려서 찰랑거리는 물결과 비슷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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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레즈비언, 동거의 시작

비범한 가족이야기 2012.03.18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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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범한 가족이야기
2012년 3월~10월까지 8개월 동안 발행되는 월간 칼럼으로,
우리 사회에서 조금은 다른 가족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의 기고 또는 인터뷰를 통해 꾸며집니다.
월마다 특별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4~5편의 가족이야기가 펼쳐집니다. 

l 3월의 키워드 ‘시작’

비범한 가족은 만남으로 시작될까요, 헤어짐으로 시작될까요? 행복, 혹은 불안으로 시작될까요. 3월의 <비범한 가족 이야기>는 결혼- 자녀의 출산이라는 전형적인 시나리오를 벗어나는, 우리 사회의 비범한 가족들의 시작’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3월의 두 번째 이야기  [2화] 레즈비언, 동거의 시작
가족? 공동체? 생각보다 꽤 좋잖아

                                             가족구성권연구모임    꾼


가족이란 

 

누가 보지만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것이 가족이라고 했던가.(<씨네21> 1998.12.15. 180호 기타노 다케시 인터뷰) 나에게 가족이란 바로 그런 존재였다. 가족은 가족이란 핑계로 나를 가두는 감옥이었고, 보이지 않는 족쇄였으며, 나의 행동을 제약하는 암적인 존재였다. 나를 이해받지 못하면서도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곳. 경제력이 없으면 발언권도 없는 곳. 사랑이란 이름으로 하기 싫은 일을 강요하는 곳. 게다가 사랑해서 결혼했다던 부모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을 하지 않았는가

 

나는, 가족이라 부르는 그 공동체를 뛰쳐나오면서 작은 다짐을 했다. “나는 애인이 생기더라도 절대 동거하지 않겠어. 사랑 따윈 거짓이야.”


연애 동거의 시작
 

 

늦은 밤 탱고를 추다가 사랑에 빠져버렸다. 예상치 못한 감정의 소용돌이 사이에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기이가 자꾸 보고 싶고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떨어지지 않으려면 같이 사는 것이 가장 좋지. 그렇지만 집을 나오면서 했던 나의 다짐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독립적인 삶을 살 건데! 아 그렇지만 집을 합치면 경제적이잖아. 집값이랑 관리비 전기세 수도세 가스비 생활비...앗! 이게 문제가 아니야!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기껏 돈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 않지. 돈은 중요하잖아. 일단 살아야 하니까...아니 지금 그걸 생각하는 게 아니잖아. 내가 이 사람이랑 같이 살게 되면 예전 나의 가족과 다를 수 있을까? 자식은 은연중에 부모를 닮는다던데 매일 싸우게 되면 어쩌지. 아니야, 어차피 결혼은 못하니까 부모님과는 다른 가족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아니지. 결혼이 무슨 상관이야! 같이 살면 부딪히는 거지. 나랑 동생은 결혼해서 그렇게 싸웠나!!!!그래도 이렇게 좋은데 설마 부모님이랑 싸운 것처럼 싸우겠어? 아 아니야 부모님도 처음엔 좋아서 결혼했다고 그랬잖아(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기이와 함께 살고, 커밍아웃을 하고 난 후 부모님의 관계는 눈에 띄게 좋아지셨다. 심지어 다음 주에는 제대로 가지 못했던 신혼여행을 가시겠다고 신이 나셨다. 무슨 조화란 말인가?)....어떻게 하지? 그냥 근처에 집을 하나 구할까? 참 나 돈 없지. 헉 돈도 없는데 만약에 같이 살다가 싸워서 쫓겨나면 어쩌지. 이거 순식간에 거리에 나앉을 수..아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좋아서 살겠다고 하면서 쫓겨날 생각을...아 하지만 혹시...? 아 어쩌지 오마이갓.

머릿속은 복잡했고 일분일초마다 생각이 바뀌었다. 짐을 쌌다가 풀기를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다 결국 난 짐을 싸서 기이의 집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기이에 대한 그리움과 경제적인 이득은 나의 모든 불안감을 잠재우고도 남을 정도의 메리트였으므로.

고양이 두 마리  

연애의 달콤함이 나를 지배하던 어느 봄 날. 고양이 두 마리가 우리를 찾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들러붙었다.’) 서로 다른 곳에서 발견된 두 마리의 고양이는, 마치 같은 어미에게서 태어난 듯 닮아 있었고, 둘 다 눈도 뜨지 못한 갓 난 아이였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애완동물 한 마리쯤 키우는 것이 어떨까.’라는 생각은 종종 해왔지만, 이렇게 어린 고양이는 생각치도 못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지 각오하지도 못했었다. 그저 저 어린 생명체가 죽어가고 있으니 이걸 어쩌나, 하는 측은지심이랄까.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이 넘치는 시기였으니. 고양이 두 마리 키우는 것은 문제없다고 섣불리 자신했다.

 


고양이가 온 다음 날부터 우리는 잠을 자지 못했다. 아주 어린 고양이는 4-6시간에 한 번씩은 젖을 물려야 했다. 우리가 잠을 잔다고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 알람을 맞춰두고 꼬박꼬박 일어나서 젖을 물렸다. 혼자서는 대소변도 가리지 못해 밥을 먹고 트림을 시킨 후 꼭 대소변을 보게 해 줘야 했으며, 괄약근 조절이 안 되는 녀석들은 깔아놓은 수건들에 실수를 해 댔다. 찍 소리도 내지 않던 이 녀석들은 밥을 먹고 살이 조금씩 올라 집이 떠나가라 목청껏 울어댔고, 고요하고 조용하던 집에서 우아하게 보내던 우리의 삶이 마구 흐트러졌다.

몇 달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우리 둘은 점점 피곤해졌고, 누가 밥을 주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서로 고양이 밥 주는 것을 미루기도 했다. 매일 혼자서 밥을 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어서 서로를 필요로 했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실망했다. 종종 의견의 차이가 생기고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건 사랑의 힘이고 뭐고 너무 힘들다고! 그렇게 힘들고 지치는 와중에 고양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났고, 애교를 부리고, 조금씩 화장실을 가리기 시작하고 제법 그루밍을 하기 시작했다. 이걸 어쩌나. 저 녀석들을 어쩌면 좋나.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저 나쁜 녀석들은 왜 저렇게 예쁘고 귀엽고 앙증맞은 것이냐.


손님들

 
그 무렵이었다. 우리 집에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고양이를 맡긴 원흉(..)인 친구가 찾아와서 우리가 시간이 되지 않을 때 밥을 주고 가곤 했다. 그 뒤로는 내 동생이 찾아와 고양이를 잠깐씩 돌봤다. 그리고 그 이후, 어린 고양이를 보겠다고 친구들이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어린 고양이를 보겠다는 핑계로 우리 집에 놀러 오던 친구들은 고양이들이 커져서 어른 고양이가 된 후에도 계속해서 밥을 먹고 가기도 하고 술을 먹고 가기도 하고 자고 가기도 했다. 밤을 새워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웃고 떠들고 춤을 췄다. 친구들은 모두 우리가 연인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도 부담 없이 자신의 연인 이야기를 하고 고민을 나눴다. 우리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친구들. 가끔은 부러워 해주고, 가끔은 신랄한 농담을 하기도 하면서 우리를 꼭꼭 세트로 생각해 주었다. 그들은 약간은 불안했던 우리의 사랑과 삶을 통째로 인정했다. 신나게 웃고 떠들고 놀았을 뿐이었지만 그것이 나에겐 우리의 사랑에 대한 지지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지지는 내가 더 당당하게 내 삶과 사랑을 긍정하는 힘이 되었고, 더욱 더 큰 힘으로 내 존재를 외치게 해 주었다.(그렇게 커밍아웃이 일상화되어 버린 것이었다. )

그때부터였을까, 사랑한다는 감정과는 다른 ‘공동체’의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세트로 묶여서 지내는 거 생각보다 꽤 좋잖아?

꼭 가족의 이름이 아니어도

우리는 가족일까? 고양이 두 마리와 나와 기이? 꼭 가족이란 단어로 묶어야만 하나? 가족이 뭘까? 내다버리고 싶은 것? 고양이 두 마리는 종종 내다버리고 싶다. 그럼 우리는 가족인가? 하지만 늘 버리고 싶지는 않은데. 게다가 나는 가족이란 단어가 싫단 말이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내게 자행되었던 감정적 폭력을 기억하고 있다고!

종종 내다버리고 싶지만 내다버릴 수 없는 존재, 같이 있어서 힘이 되고, 행복해지고 삶에 감사하게 되는 존재. 의견의 불일치로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화도 내고 심통도 부리지만 그래도 같이 살고 싶어서 풀어가는 존재. 험난한 세상에서 지친 마음을 보듬어 주는 존재. 타인에게 배타적이거나 폐쇄적이지 않고, 오히려 타인에게 지지받는 존재. 꼭 가족이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존재를 부를 말.(혹자는 이것을 가족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우린 가족이로군?) 그 단어가 우리 관계를 명명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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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비혼 여성의 시작

비범한 가족이야기 2012.03.18 23:44


l 비범한 가족이야기2012년 3월~10월까지 8개월 동안 발행되는 월간 칼럼으로, 우리 사회에서 조금은 다른 가족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의 기고 또는 인터뷰를 통해 꾸며집니다. 월마다 특별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4~5편의 가족이야기가 펼쳐집니다. 

l 3월의 키워드 ‘시작’

비범한 가족은 만남으로 시작될까요, 헤어짐으로 시작될까요? 행복, 혹은 불안으로 시작될까요. 3월의 <비범한 가족 이야기>는 결혼- 자녀의 출산이라는 전형적인 시나리오를 벗어나는, 우리 사회의 비범한 가족들의 시작’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3월의 첫 번째 이야기  [1화] 비혼여성의 시작
스스로 묻고 답해야만 얻을 수 있는 독립, 비혼 여성

                                                  언니네트워크/가족구성권연구모임     더지


비혼 여성에게 가족의 시작이란 무엇일까. 대개 ‘결혼’이 가족의 ‘시작’을 의미한다면 ‘결혼 안한’ 비혼은 ‘시작하지 않은’ 존재일까. 게다가 비혼 여성에게 ‘가족 이야기’랄 것이 있을까. 6년 전 마련한 소형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사십 대 중반의 비혼 여성 사뿡에게 질문을 던졌다.

독립, 첫 질문을 던지다


사뿡은 엄마, 언니들과 함께 살다가 친언니들은 하나둘 결혼하여 분가를 했고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둘이 살게 되었다. 20대 중반부터 직장에 다녔고, 다른 형제들의 도움없이 경제적으로 어머니를 부양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별 생각없이 자연스럽게 어머니를 부양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20대의 막내 동생이 짊어진 적지 않은 부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언니들에게 이제 와서 섭섭한 생각이 든다고 한다.



이전에는 먼저 결혼한 자녀가 부모를 모시는 일이 많았다고 하지만, 요즘에는 자녀들이 결혼해서 독립하면 마지막에 남겨진 자녀가 부모님과 함께 살며 돌보는 일이 많다. 특히 결혼하지 않거나 결혼 생각이 없는 비혼 여성들이 그런 위치에 놓이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울어야할지 웃어야할지 모를 이야기지만, 부모도 형제들도 ‘부모를 돌보며 사는 비혼 자녀/형제’에게 “결혼 안 하냐”고 찔러 볼지언정 굳이 비혼 상태가 ‘나쁘다’고 긁어부스럼 만들지는 않게 되는 것이다.


20대 후반, 결혼하고 싶다거나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그녀에게 문득 ‘결혼을 하지 않으면 계속 엄마와 살게 되는 건가’하는 의문이 생겼다고 한다. 여자의 최종적인 독립은 결혼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고, 그런 의미에서 언니들의 분가와 독립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결혼할 계획이 없는 비혼 여성에게 독립은 어떻게 살 것인지 스스로 묻고 답하는 순간들이 쌓여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일인 것이다.


“결혼을 하든 안하든, 나이가 들면 원가족으로부터 독립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니까. 모험을 해보자고 한 거지.”


독립이라는 모험을 기록한다면 : 표류기 또는 성장기

 

주인집에 딸린 셋방을 구해서 독립의 첫 걸음을 뗐다. 주택의 청결 상태가 좋지 않아 무척 괴로웠다고 한다. 가족이 아닌 타인들과 공간을 공유하는 경험도 썩 좋지는 않았다. 자신의 방에 누군가 몰래 들어왔다 나간 흔적을 발견한 이후에는 셋방을 빼고 다시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을 나온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어머니와 몇 년을 살다가, 이번에는 다시 오랜 친구와 함께 집을 구해서 살았다. 집을 나올 때 어머니는 무척이나 서운해하셨다고 한다. 두 번째 시도는 비교적 괜찮았다. 함께 사는 친구와 서로 자연스럽게 배려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실패로 돌아간 첫 독립의 경험으로부터 타인과 함께 생활할 때 자신이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 좋아하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보이지 않게, 두 번째 독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자신의 집을 마련하여 혼자 살게 된 것은 친구와 5년여를 살고 헤어지게 된 2006년부터이다.

 


삶의 여러 분기점들 중에 자신의 독립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사뿡은 “지금 사는 집을 얻어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라고 대답했다. 사뿡에게 ‘혼자 산다는 것’은 ‘결혼을 안해서’라기보다 자신에게 적합한 생활방식을 찾은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수년 간 여러 가지 삶의 형태와 관계를 지나며 쌓아온 경험들은 모두 현재 자신의 삶을 방식을 만들어내기까지 필요했던 과정과도 같다.   


비혼 여성의 독립은 시작일까 완성일까


비혼 여성의 독립에는 많은 준비와 시간, 성찰이 선행된다. 결혼을 가족의 ‘시작’이라 말하기는 쉽지만, 비혼 여성의 ‘독립’을 ‘시작’이라 표현하기에는 독립까지 걸어온 시간의 무게감이 크다. 또 ‘완성’이라고 하기에는 이후에 펼쳐질 이야깃거리들이 무궁무진하다는 측면에서 부족한 듯하다. 완성이기도 하고 시작이기도 한 비혼 여성의 독립 역시 오늘날의 새로운 가족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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