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혈연가족, 시작과 새로운 시작

비범한 가족이야기 2012.04.05 12:50

l 비범한 가족이야기2012년 3월~10월까지 8개월 동안 발행되는 월간 칼럼으로, 우리 사회에서 조금은 다른 가족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의 기고 또는 인터뷰를 통해 꾸며집니다. 월마다 특별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4~5편의 가족이야기가 펼쳐집니다. 

l 3월의 키워드 ‘시작’ 비범한 가족은 만남으로 시작될까요, 헤어짐으로 시작될까요? 행복, 혹은 불안으로 시작될까요. 3월의 <비범한 가족 이야기>는 결혼- 자녀의 출산이라는 전형적인 시나리오를 벗어나는, 우리 사회의 비범한 가족들의 시작’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3월의 네 번째 이야기  [4화] 혈연가족, 시작과 새로운 시작

친족 모임이라는 불안공동체, 그 안의 변화

* 이 글은 인권오름 292호로 발행되었습니다.

가족구성권연구모임   김원정

 

 

 

‘집안사람들’

 

나는 유난히 뼈대 있는 가문을 강조하는 집안에서 딸 셋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덟 형제자매 중 막내였기 때문에 ‘대를 이을’ 아들이 절실하지는 않았지만, 아들이 하나도 없는 집은 우리 집뿐인지라 엄마가 자주 할머니 눈치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비록 딸내미지만 아버지는 늘 ‘의성김씨 문충공파 16대 후손’임을 잊지 않게 하셨고 우리 가문의 ‘양반됨’을 강조하셨다. 4대를 모시는 제사와 명절 차례를 지내느라 1년에 최소 10번은 큰집에 가곤 했는데, 그 때마다 조카들을 불러 모아 조상의 업적을 설명하시던 큰아버지 말씀은 보충수업이었다. 그렇게 가문의 일원으로 성장하던 나는 초등학교에서 김씨인 급우들의 본을 묻고, 의성김씨를 찾으면 아버지에게 ‘집안사람’인 친구가 있노라 신고까지 했다.

 

얼마 전 영화 <범죄와의 전쟁>을 보고 나는 잊었던 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정·재계 인사들은 물론 범죄조직 보스까지 경주최씨 충렬공파라는 ‘집안사람’으로 묶어 서로 봐주고 밀어주는 네트워크를 형성했던 최익현(최민식). 요즘 젊은이들이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을 장면들에 일가 사람을 늘 강조하며 살아온 내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져 놀라고 또 놀랐다. 1960년대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대학을 나온 아버지. 이렇다 할 재산도 없는 아버지에게 ‘집안사람’은 아버지가 닿을 수 없는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루트였다. 자원이라고 해봐야 그리 큰 것도 아니다. 가족이 아플 때 조속히 입원을 알선해 주는 정도의 도움? 그러나 사회안전망이 전무했던 70-80년대 ‘빽’도 없는 평범한 회사원 아버지에게 가문 네트워크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일종의 보험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보다 가까운 친족을 서로 거두며 사는 건 일상이었다. 나름 자가 아파트였던 어릴 적 우리 집엔 여러 사촌 언니 오빠, 이모 삼촌들이 거쳐 갔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지방서 살다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사촌들은 아마도 월세 방이라도 구할 때까지 우리 집에 머물렀던 것 같다. 우리 자매들은 밤새 놀아주는 사촌들과의 동거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지만, 엄마 입장에선 결코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친족공동체 구성원들을 거두는 건 상호적이었다. 엄마는 막내 동생을 낳아 힘들 때 언니를 고모 집에 몇 달 간 맡겨두기도 했고, 방학 때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는 세 딸을 몽땅 작은 집에 보내 그나마 숨통을 틀 수 있었다.


30년 만의 친족 모임 부활


내가 양반 가문의 일원을 자처했던 어릴 적 에피소드는 어디 가서 말하기도 부끄럽다. 이 집안에서 각종 의례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다른 집 새끼들까지 돌보며 살아야했던 엄마들의 삶을 돌이켜보면 아찔하다. 그러나 70년대 고향을 떠나와 핵가족을 꾸린 엄마와 아버지에게 친족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였다. 지금 나와 그 친족들 사이의 거리는 한참 멀지만, 사별한 아버지가 때론 딸들보다 당신 형제자매와 조카들에게 더 정서적으로 의지하는 걸 보면 아버지에게 이 공동체의 의미는 변함없는 것 같다.

 

8년 전 결혼을 하면서 나는 더더욱 친척들과 멀어졌다. 그러다 몇 년에 한번 어른들을 뵐 땐 출가한 딸이라는 나의 위치가 새삼 확인되곤 한다. 정씨 집안에 시집갔다 하여 큰아버지는 나를 “정실이”라 부른다. 나는 할머니가 시집간 고모들을 이렇게 부르는 걸 듣고 자란 터라 알지만, 생전 처음 들어본 사람도 많을 것 같아 네이버 오픈사전을 인용하여 ‘실이’의 뜻을 풀어보면 “여성이 시집을 가면 시가의 성을 따라 부르는 호칭”으로 “주로 친정에서 사용되는 호칭인데 ‘김실이’ ‘이실이’ ‘강실이’ 이렇게 부른다.”

 

그런 내가 얼마 전 친족 모임에 호출되었다. 아버지 8남매와 그 자식들이 모두 모이니 필히 참석하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이럴 때 얼굴 비치는 것 말고 딱히 효도 실천이 없기에 군말 없이 나가기로 했다. 사실 나의 임무는 아버지가 내 조카들을 친척들에게 선보이는 일을 돕는 것, 두 새끼를 이고 지고 온 동생을 보조하는 역할이 요구된 것이다. 30명이 넘는 친척들이 모였고, 그날 모임은 정식으로 발족(?)하여 연중행사로 자리 잡았다. 오는 5월 대규모 친족 모임이 기획되었는데, 이건 내가 초등학교 때 이후 처음이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왜 이 친족들은 ‘가족’으로 다시 서로를 묶으려는 걸까.


아마도 큰아버지의 병환이 자극이 되었던 것 같다. 머지않아 형제자매들이 한분 두 분 돌아가시게 되면 이 혈연공동체가 사라질까봐 두려운 게 그 세대 심정이다. 그런데 이 모임이 계속 유지된다면 아버지 세대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될 거란 느낌을 받았다. 그날 남자 사촌들끼리는 평소 연락을 하며 만나고 지내왔다는 걸 알고 놀랬는데, 이 모임은 자연스럽게 중년 남자 사촌 중심의 네트워크가 될 것 같다. 특히 모임의 결성과 기획을 주도하고 비용을 부담한 사촌들은 누가 봐도 사회적 지위가 탄탄한 오빠들이었다. 그렇지 않은 남자 사촌들은 거의 참석도 하지 않았다. 우리 세대에 친족공동체는 이렇게 다른 의미로 전환되어야 유지될 수 있는 네트워크가 되었다. 서로 얼굴과 이름도 잘 기억 못하는데 핏줄이 무슨 소용인가. 그 빈자리를 채워 줄 명분은 아마도 힘과 자원을 가진 사람에 의해 세워질 것이다. 어찌 보면 혈연가족을 유지해 온 실제의 메커니즘도 사실 이것이다.


친족에서 핵가족으로, 다시 새로운 가족으로


며칠 후 연락 담당을 맡은 사촌 오빠에게서 메일이 왔다. 8남매와 자녀, 그 배우자, 손주와 증손까지 무려 130명의 이름과 주소, 연락처가 적힌 주소록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름조차 낯선 사촌과 조카들이 수두룩했지만, 이 엑셀 파일에 담긴 흥미로운 정보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주소만으로도 노년의 고모들을 누가(아들 혹은 딸) 부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고, 집안의 형제자매들이 이룬 각각의 가족들이 한 동네에 모여 사는 경향도 발견되었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자매들이 어머니와 함께 한 아파트에 살고 있기도 했다. 오늘날 핵가족들이 어떻게 돌봄의 부담을 나누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지도였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34명의 사촌들이 엑셀의 <배우자>와 <자녀 1>, <자녀 2> 항목을 대부분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는 점이다. 빈 칸은 주로 우리 집에 몰려 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나의 언니뿐이고,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는 사람은 나와 최근 결혼한 사촌 둘 뿐이다. 이혼한 사촌은 단 한명도 없다. 요즘 시대에 이렇게 한결같이 ‘정상가족’을 꾸려 사는 집안이라니! 이 가운데 비혼을 선언한 우리 언니는 가히 ‘미친 존재감’이다. 물론 여기 적힌 친척들은 언젠가 언니는 결혼을 하고 나는 아이를 낳으리라 기대하겠지만 말이다.

 

이 친족공동체에서 탄생한 ‘정상가족’들의 분포가 유독 강한 혈통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이성애 핵가족의 규모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내 친족공동체의 강력한 가족 규범 속에서도 ‘다른’ 가족은 싹텄다. 적어도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의 조카들에겐 더 많은 선택의 가능성이 열려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서 혈연과 친족관계에 기반을 둔 가족은 멀어지겠지만, 서로 돌보며 살아가는 생활공동체가 엑셀에 질서정연하게 담을 수 없을 만큼 다채롭게 구성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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